간새다리의 한국어 가르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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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어 강사다

나의 직업병

간새다리 2010. 2. 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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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한국어 강사들도 직업병을 가지고 있다. 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한국어 강사의 직업병은 언어 생활과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있는지도 모르던 직업병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국어 강사 생활을 하다가 보니 나도 어느샌가  심각하게 앓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증상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먼저, '저주 받은 손가락' 증상이다. 이 증상은 주로 초급 강사한테서 나타나는 것으로 수업 시간에는 유용하고 필요하지만 교실 밖에서는 매우 쓸데없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한국 사람 앞에서 툭툭 튀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학교 앞 김밥집에 가서 김밥을 살 때, '김밥 한 줄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검지 손가락이 일어나면서 얼굴 앞으로 툭 튀어 나오거나 누군가와 대화시 '안 돼요'나 '없어요'라는 말과 함께 양손으로 X자를 만들어 보이는 경우를 말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본인도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저주 받은 손을 원망하게 되고 상대방도 종종 '뭐 하시는 건지?'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음으로는 '단어 상실증'이다. 이 증상은 평소 대화중에 별것 아닌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아~ 그거 뭐지?'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으로 그 심각성은 당연히 가르치는 급별로 다르다. 이 증상은 많은 시간을 학생과 함께 또는 수업 준비와 숙제 검사를 하고 제시 어휘를 가지고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조금 어려운 단어라든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는 하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어휘의 경우 쉬운 단어로 대체해서 사용하고 풀어서 말하게 되니까 사용 빈도가 낮아지고 꼭 사용해야 할 때는 정작 생각나지 않는다. 이 증상은 때로 '내가 한국어 강사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괴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다행히 고급을 가르칠 때는 어느 정도 원상복구가 되기는 하지만 초중급을 가르칠 때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단어 상실증을 피해 가기 어렵다. 나도 매학기, 매년 이 증상을 고치기 위해서 신문 읽기와 독서를 생활화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의지박약한 성격 탓에 작심삼일에 그쳐 버린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빨간펜' 증상이다. 이 증상은 언제, 어디에서든 오류 수정을 위해 빨간펜을 든 '강사' 모드로 변환하게 하는 것으로 텔레비전의 자막, 식당의 메뉴판, 인터넷 기사와 그 밑에 달린 댓글,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발음과 드라마 속 배우들의 발음까지 그 대상은 광범위하다.

  '찌개'를 '찌게'로 쓴 식당 메뉴판을 보면서 강사들끼리 '이거 바꾸라고 말해 줄까?'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학교 곳곳에 붙어 있는 안내판 문구에서 발생한 맞춤법 오류를 보고 올 때마다 '저거 볼 때마다 펜 가져 가서 고쳐 주고 싶어'라고 토로하고 텔레비전 자막에서 맞춤법 오류를 발견하면 혀를 차며 '저러니까 사람들이 다 잘못 쓰지'라고 안타까워 한다. 이 증상은 맞춤법 오류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르다'와 '틀리다'처럼 잘못 쓰기 쉬운 표현들이 실제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고쳐 주고 싶고 같이 얘기하고 있는 상대가 잘못 쓰면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그게 아니고 이거'라고 수정한다. 또한 해당 용언이나 단어에 호응되지 않는 조사를 쓴 것도 불규칙 용언의 활용을 잘못한 것도 거슬린다. 

  그러나 나도 국어 어문규정을 모두 숙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저거 맞는 거야, 틀린 거야?' 싶을 때가 있는데-특히 띄어쓰기- 이때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고 정말 별거 아닌 걸 가지고 동료 강사들과 심각하게 토론을 하기도 한다. 일례로 <선덕여왕>이 한참 인기를 끌 무렵, 도대체 '유신랑!'이라고 부를 때 그 발음이 [유신낭/랑]이 맞는지 [유실랑]이 맞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서[각주:1] 선배 강사들과 한참을 얘기한 적도 있다.  

  이 증상은 초중고급을 막론하고 발생하는 것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못 튀어나오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주의하고 자제심을 발휘해야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 외에도 강사마다 급별로 직업병이라고 느끼는 증상이 몇 가지 더 있기는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세 가지 증상은 많은 한국어 강사들이 동감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직업병처럼 전문가의 처방이나 상담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웃고 넘길 에피소드 뿐이지만 문득문득 나의 이런 모습을 볼 때는 내가 이 직업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런 증상을 뛰어 넘어야 '고수 강사'가 되는 건가? 



긴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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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한된 경험만으로는 너무 부족해서요.^^
  1. 실제로 출연 배우들도 전자의 발음으로 부르는 사람과 후자의 발음으로 부르는 사람이 거의 반반이었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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